Categories
아무말대잔치

이것도 기획안이라고 들고온거야?

B2B 제품 기획일을 하고 있어서 B2C랑 얼마나 다른지까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대략 비슷한 맥락은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기획일 하는 사람들 정말 존경한다.

관성적으로 일하려고 생각하면 기획일은 어쩌면 아무 것도 아닐 수도 있다. 고객이, 시장이 필요로 하는 게 명확하거나 혹은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발굴해야 하거나 하지 않을 경우는 더더욱. 세상에 처음부터 새로운 것도 없고, 모방 없이 창조 없다는 말이 정말로 기획 업무를 하다보면 실감이 난다. 소비자가 원하고 경쟁사가 하고 있다면 그게 무엇이든 정말로 외면하기 어렵다. 그걸 비틀어서 더 나은 무언가를 생각해 내는 것도 더더욱 어렵다.

기획하는 제품이 해당 시장에서 리더로 모든 방면에서 경쟁사들을 압도하는 기술력이나 브랜드를 가지고 있다면, 어쩌면 기획 업무가 좀 편할 수는 있겠다. 어떻게 기획해도 세계 최초이거나 세계 최고라면 할만하지 않을까?

하지만 보통의 일반적인 경우 기획 부서에서는 개발팀의 실력치를 탓하기 쉽상이고, 개발팀에서는 저것도 기획이랍시고 들고 온 사람의 지능 수준을 개탄하기 쉽상이다. 나는 이미 다 만들어진 제품의 성능을 평가하는 부서에 있을때 기획과 개발 둘 다 한탄한 적이 정말 많았다. 그리고 지금은 내가 그렇게 개탄했던 상품 기획 부서에서 대체 왜 이렇게 기획이 잘 풀리지 않는지를 몸소 체험하고 있다.

상품기획은 대표적으로 하는 일이 잘 보이지 않는 곳이다. 수치로 드러낼 수 있는 거라고는 어떤 과제를 몇 개 기획했냐인데, 실상은 그 과제 개수가 많다고 해서 반드시 대단한 건 아니다. 기획이 그렇게 금방 금방 된다는 건 본인이 고민할 여지가 그만큼 적다는 뜻이 되고, 실제로는 고객이나 개발에서, 혹은 경쟁사가 가진 사양을 받아쓰기 했다는 뜻도 된다.

그래서 어렵다. 상품 기획은 현재 개발팀이 가지고 있는 실력치라는 땅 위에 서서 고객이 혹은 고객의 소비자가 지향하는 구름을 올려다보며 세상에 없던 나무를 그려나가는 일을 해야 한다. 운이 좋다면 그 나무가 무럭무럭 자라서 구름 근처까지 갈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씨앗이 땅에 내려가기도 전에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어쩌다 크기 시작해도 이미 자란 경쟁사의 나무에 가려져 햇볕(=고객의 관심)을 받기 어렵다.

비싼 제품은 성능이 다들 고만고만 하기 때문에, 어떤 차별화된 기능을 발굴해서 고객에게 제안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게 어렵다. 싼 제품은 싸게 만드는 것 자체가 일단 어렵다. 제품에 들어가는 리소스가 풍족하더라도 기획은 쉽지 않고, 반대로 쓸 수 있는 리소스가 너무 부족해도 기획은 어렵다. 중간은 그 중간 나름대로의 어려움이 있다. 가격과 기능 사이에서 어떻게 중심을 잡아야 할지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는 일이 드러나지도 않고, 어쩌다 기획이 통과되어서 프로젝트가 착수 되어도 고민이 점점 많아진다. 기획 의도대로 팔릴까? 고객들이 외면하면 어쩌지? 이 기능을 억지로 주장해서 넣었는데, 고객들이 안쓰면 개발팀에 무슨 면목으로 설명하지…?

채택되는 아이디어가 하나라면, 거절되는 아이디어는 열 개가 넘는다. 조금 아쉽게 채택되지 않은 게 2~3개 정도라면 선방이다. 나머지는 비웃음을 사기 쉽상에다가 유관 부서에서 (예전에 나처럼) 비난하기 쉽상이다. 결정도 어렵고, 고민은 길다.

유일한 즐거움은, 나의 아이디어가 받아들여지고 유관 부서나 고객과 함께 그 작은 아이디어를 발전시켜서 실제 제품에까지 이어지게 만드는 것이다. 뭔가 대단히 혁신적이거나 특허를 쓸 정도의 것이 아니더라도 좋다. 작지만 의미 있는 통찰, 조금 다르게 바라보는 접근, 기술의 의미에 대한 발견. 이러한 적극적인 활동들이 제품이라는 결실로 맺어져 고객과 소비자에게 전달될 때 기획인으로서 뿌듯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 때 쯤이면 나는 다른 새로운 걸 기획하고 있을테고, 어쩌면 상당수가 내가 기획했다라는 걸 잊을테지만, 그러면 뭐 어떠랴. 무럭무럭 자라난 그 제품을 보며 내가 뿌듯하면 그만일테지.

기획은 어렵다. 이 것도 기획안이라고 들고 온거야? 라며 서류 뭉치를 내던지는 드라마의 한장면을 볼때마다 감정 이입 되서 서글프다. 하지만 9번 거절 당해도 10번째 다시 새로운 기획안을 들고 간다. 언젠가 거목으로 성장할 나무를 꿈꾸며.